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문단 편집)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도난 사건[* 본 단락은 전적으로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 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내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565|법보신문 -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02800329205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10-28&officeId=00032&pageNo=5&printNo=6784&publishType=00020|경향신문: 1967년 10월 28일자 기사 - 잃은 國寶 찾은 國寶 表忠寺靑銅含銀香]]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565|법보신문: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 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1965년 1월에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절도죄|도난]] 사건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정치적 격량으로 나라는 어수선하고 국민들은 가난하며 문화재 보존 의식이 높지 않던 시기인 1950~1960년대에 이를 틈탄 문화재 도난 사건이 잦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1967년에 발생하여 현재까지도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은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보다 2년 앞서서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도 도난 사건을 겪었다. 본 향완은 1957년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관련 문헌들에서 딱히 확인되진 않는다.] 발견된 뒤로 1963년경까지 [[표충사]]의 총무 스님이 본 향완을 애지중지하면서 따로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출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31800209205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3-18&officeId=00020&pageNo=5&printNo=12732&publishType=00020|동아일보 1963년 3월 18일자 기사 - 國寳巡禮(국보순례) (81) 表忠寺靑銅含銀香(표충사청동함은향)]]] 그러다가 이후에 표충사 경내에 사명당유물관이 생기면서 여기로 옮겨져서 보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5년 1월 19일에 밀양 교육청의 한 공무원[* 이모 계장이라고 전한다.]이 문화재 실태 조사를 위해 유물관을 방문했을 때, 본 향완이 들어가 있던 유물함이 박살이 난채로 유물은 도난당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표충사의 스님들은 도난 사실을 바로 경찰에 알렸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수사에 착수해서 여럿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 조사함과 동시에 나라의 국보가 도난 당했다는 것을 일반에 알려서 해외 반출을 막으려고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향완 [[도둑]]에 대한 별다른 실마리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수사에 착수하고 두 달 가량이 지났을 때 경찰은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받고는 1965년 3월 28일에 서울에 위치한 용의자의 집에서 유력 용의자를 체포 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허튼 제보는 아니라서 체포된 용의자가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도난 사건의 진범임이 확인되어 공범 일당도 함께 검거하고 본 향완도 회수할 수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주범인 송모씨와 공범인 박모씨와 최모씨 일당이 1월 18일 새벽 5시 경에 표충사 유물관으로 잠입하여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을 절도한 것으로 드러났고, 본 향완 뿐만 아니라 안양 염불암과 [[평창]] [[상원사]]에서도 유물들을 절도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들 일당은 서울에 있는 골동품상인 이모씨에게 훔친 유물들을 팔아 넘겼으며, 이모씨는 이들 일당이 파는 유물들이 [[장물|절도품임을 알면서도 매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가 막히는 사실은 범인 일당이 본 향완을 당시 돈으로 5만원에 이모씨에게 넘겼는데, 이를 2020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만원 정도 하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참조: [[http://www.kostat.go.kr/incomeNcpi/cpi/cpi_ep/2/index.action?bmode=pay|통계청 - 화폐가치계산]]] 더욱 기가 막히는 부분은 장물상 이모씨를 포함한 범인 일당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지금도 아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 당시 일반 국민들의 문화재 보존 인식이 상당히 낮았으며 이러한 부분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